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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엘리트 확보 경쟁

  • 매일경제신문 이진우 지식부장
  • 2021-10-20
  • 조회수 745
분류 생각 더하기
발행호수 2021-10
저자 매일경제신문 이진우 지식부장
   

우리 리서치 PLUS - 2021년 10월호

 

생각 더하기: ‘공정’과 엘리트 확보 경쟁

 

“양국 간 파트너십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우리는 기후, 글로벌 보건, 5G 및 6G 기술과 반도체를 포함한 신흥기술, 공급망 회복력, 이주 및 개발, 우리의 인적교류에 있어서 새로운 유대를 형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21일(현지시간) 발표한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의 한 대목이다. 기술동맹, 미사일지침 종료 등에 밀려 당시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국내 기업과 과학기술계가 주목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인적교류(people-to-people relationship)’라는 말이었다.

한미 기술동맹이 본격화하면 한국의 우수 기술인력이 썰물처럼 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사실 동맹의 핵심은 사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동맹은 더욱 그렇다. 서류나 전화, 이메일이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소통하며 기술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 기술동맹이다. 한국 엔지니어가 미국에서 일하고, 미국 엔지니어가 한국에서 일하는 구조다. 얼핏 공평한 윈윈(win-win)게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국 대기업에서 연구개발업무을 맡아왔던 A씨는 얼마 전 다국적기업의 미국내 연구소로 스카웃됐다. 훨씬 더 많은 연봉과 더 좋은 교육·생활여건, 엔지니어로서 더 풍부한 자기계발 기회가 제시됐다. A씨의 표현대로라면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내는 ‘근사한 곳에서 살 수 있어 잘됐다’며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인력 유출이라고 하면 중국을 떠올렸다. 한국 대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들을 중국기업들이 앞다퉈 모셔가던 시절이 있었다. 생활여건은 한국보다 다소 떨어져도 몇 년 동안 바짝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지금은 중국뿐만이 아니고, 연봉뿐만이 아니다. 한국보다 훨씬 나은 생활, 교육 인프라를 갖춘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이 한국의 고급인력을 모셔가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도 한 몫하고 있다. 기술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우수인력의 해외유출 속도도 한층 빨라지는 형국이다. 아직 구체적인 통계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훗날 집계되면 기록적인 숫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월 말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재진출을 선언했다. 이후 발 빠르게 대규모 투자를 이행하고 있다. 지난 9월 24일(현지시간)에는 미국 애리조나에 20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인텔은 애리조나 외에 뉴멕시코에 있는 공장을 증설하는 데 35억 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인텔은 이들 공장에서 일할 숙련된 기술자를 어디서 데려올까. 미국 본토에 남아있는 파운드리 기술인력이 얼마 없는 만큼 대만 또는 한국의 엔지니어를 모셔오려는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전기차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세계대전급 ‘사람 경쟁’을 벌어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 2017년 ‘유럽 배터리 연합’이라는 배터리 산업육성 정책을 내놨다. 이후 무서운 속도로 배터리 생산 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유럽 곳곳의 공장에서 필요한 기술인력이 나올 곳은 빤하다. 한국, 중국 기술자들의 몸값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반도체, 배터리뿐만 아니라 AI(인공지능), 자율주행, 빅데이터 등 한국이 경쟁력을 갖추고 있거나 갖춰가고 있는 분야에서는 예외 없이 인재 해외유출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이미 기업들은 더 많은 연봉과 복지, 승진기회를 통해 고급인력을 붙잡고 있다. 핵심기술 유출 방지와 기술경쟁력 유지를 위해 엔지니어 인력을 별도 관리하는 대기업이 많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국도 꽤 살기 좋은 나라다. ‘US뉴스&월드리포트’가 매년 발표하는 살기좋은 나라(Best Countries) 종합순위에서 한국은 2021년 15위에 랭크됐다. 2017년 23위에서, 2018년과 2019년 22위, 2020년 20위에 이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기술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이유는 일반인이 아닌, 엘리트에 대한 제도적인 사회여건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기 때문이다. 민간기업 차원에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요인이다. 병역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살인적인 수준까지 치솟은 주거비용과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 않은 교육여건, 고소득자에게 유난히 가혹한 세금제도 등이 한국의 고급인력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52시간 근무제 같은 노동규제도 개발성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엘리트 기술인력에게는 탐탁치 않은 제도다.

이건 애국심에 호소한다고 통할 일이 아니다. 제조업으로 먹고살면서, 극심한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으로선 인재를 해외에 빼앗기는 상황은 자칫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중국의 ‘천인계획(千人計劃)’ 같은 핵심인재 확보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문제는 엘리트 우대정책이 시대적 화두인 ‘공정’과 ‘능력주의’ 논쟁에서 맞부딪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열린 세계지식포럼에서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성공사다리에 있는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노동의 존엄성에 집중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존중받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센델 교수의 말처럼 양극화 현상은 세계 공통의 문제다. 우수 기술인력 확보 경쟁도 그러하다. 국가와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엘리트를 우대하는 게 맞아 보이지만, 그렇게 하면 양극화 현상은 심화된다. 나라마다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선택에 따라 한국경제의 운명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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