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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국의 꿈, 반도체가 이뤄낼까

  • 한국경제신문 이심기 산업부장
  • 2021-03-19
  • 조회수 283
분류 생각 더하기
발행호수 2021-03
저자 한국경제신문 이심기 산업부장
   

우리 리서치 PLUS - 2021년 3월호 -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생각 더하기: 산유국의 꿈, 반도체가 이뤄낼까

 

반도체와 석유. 이질적인 두 상품을 비교하는 기사가 최근 블룸버그통신에 올라왔다. ‘한국과 대만의 칩 파워, 미국과 중국을 뒤흔든다’는 제목의 기사는 코로나19가 촉발시킨 IT기기의 판매 증가와 이로 인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수요 촉진이 한국과 대만에 대한 글로벌 의존도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대만이 전 세계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것을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전 세계 석유의 공급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에 비교했다.

 

반도체와 원유시장의 공통점은 소수의 업체(또는 국가)가 가격을 좌우하는 과점 시장이라는 점이다. 특히 메모리반도체가 그렇다. 지난해 4분기 글로벌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장점유율 합계는 72%(매출액 기준)에 달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조사결과를 보면 28년 연속 D램 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가 시장점유율 42.1%로 여유있게 경쟁사들을 따돌렸고, SK하이닉스도 29.5%로 2위에 올랐다. 3위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의 점유율(23.5%)을 더하면 상위 3개 업체가 전 세계 D램 시장의 95% 이상을 싹쓸이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의 반도체 쇼티지(공급부족)는 글로벌 산업계 전반에 걸쳐 가동률 저하라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미 GM, 포드, 폭스바겐, 도요타, 닛산 등 글로벌 자동차메이커들이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조업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반도체를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과 함께 4대 핵심 품목으로 지목해 공급망을 100일 동안 재검토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 정부는 국방수권법까지 끌어들여 파격적인 보조금을 줄테니 한국과 대만을 향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여기엔 12%에 불과한 반도체 자급률을 올리지 않을 경우 자칫 미국 산업 전반이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하고 있다.

 

OPEC이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 고의적인 감산 결정으로 오일쇼크를 일으켜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반도체가 ‘자원의 무기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력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반도체와 원유의 차이점은 시장 수요다. 반도체가 ‘뜨는 해’와 원유는 ‘지는 해’다. 지난해 3분기와 4분기 글로벌 항공여객 수요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전년대비 각각 56%와 33%  감소했다. 최근 원유가격이 배럴당 60달러대를 회복했지만 공급요인에 의한 측면이 크다. 무엇보다 세계 각 국이 재생과 청정에너지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화석연료를 멀리하고 있다.  한때 ‘피크오일(석유고갈)’로 세계 경제가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지금은 석유 산업이 수요 부족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수요 측면에서 위협받고 있는 석유와 달리 반도체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반의 디지털전환(DX) 시대를 맞아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래 산업을 끌고 갈 기본 에너지 단위가 된 것이다.

 

재생에너지에 밀려나고 있는 석유와 달리 반도체는 그 어떤 대체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다. 1985년 일본에 밀려 D램에서 철수했던 인텔이 2015년 마이크론과 손잡고 D램을 대체하기 위해 시도했던 ‘크로스포인트’가 사실상 실패로 끝난 게 단적인 예다.

 

설사 D램을 능가하는 소자(素子)를 만든다고 한들 이미 촘촘하게 짜여진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우선 새로운 소자를 만들 생산설비를 누가, 언제 만들 것인가. 이미 D램을 장착한 각종 전자제품과 칩셋을 바꾸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차라리 윈도우와 같은 컴퓨터 운영시스템(OS)를 바꾸는 게 다 빠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결론적으로 반도체는 이제 원유를 능가하는 ‘상품’이 돼버렸다. 한 때 ‘자원의 무기화’라고 하면 원유부터 떠올렸지만 반도체 품귀를 해결하기 위한 선진국의 쟁탈전도 그에 못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시장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국내 경제로 관점을 옮기면 수출상품으로서의 반도체의 가치는 확연하다.  반도체는 수십년간 대한민국 수출 경제를 이끌어온 대표산업이다. 2013년 이후부터는 수출품목 1위를 유지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우리 수출의 19.3%(2020년 기준)를 차지했다. 1,000억달러에 육박하는 반도체 수출액은 석유수입 총액을 채우고도 남는다. 중동의 산유국들의 석유 의존도에는 못미치지만 반도체 없이는 대한민국의 수출산업이 온전히 지탱하기는 어려운 상황임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한국을 먹여살리는 반도체 산업의 지위는 유지 될 것이다.  반도체 신화는 계속돼야 한다. 석유의 시대가 무한정 이어질 것으로 보고 흥청망청대다 원자재의 저주에 빠져 헤매는 산유국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나. 그 해법을 찾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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