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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침범이 두려운 이유 - 매일경제신문 경제부 이진명

  • 이진명
  • 2020-08-21
  • 조회수 517
분류 생각 더하기
발행호수 2020-08
저자 이진명
   

[생각 더하기]
빅테크 침범이 두려운 이유


은행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저금리? 과잉규제? 과격한 노조? 내 눈엔 빅테크가 보인다. 은행이 독점하던 전통 금융시장에 슬그머니 손을 뻗어오는 네이버, 카카오가 섬뜩하다. 유독 빅테크가 눈에 띄는 것은 언론이 네이버에 서서히 종속되어가는 과정을 보아왔고 지금도 실감하고 있어서다.
남의 영역에 진출해 자리 잡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남의 영역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자들이 흔히 '텃세'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 영역에서 경쟁력이 부족해서다.
한때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이 거대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믿고 금융사업에 진출했다가 쓰라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현대차그룹에서 현대할부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판매를 지원하던 현대캐피탈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매물로 나온 대우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하고 2001년 현대카드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안착하는 듯했으나 4년 만에 대규모 부실을 초래했다. 당시 이계안 현대카드 회장은 현대자동차에서 사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며 이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제조업에서는 물건을 잘 만들어 많이 팔면 그만이었는데, 금융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금융은 팔 때도 사람을 가려가며 조심해서 팔아야 하고, 팔고 나서도 사후관리를 계속해야 하는 일이더라. 금융을 제조업하듯이 했으니...."
LG전자 가전제품 판매를 지원하던 금성팩토링, LG할부금융, LG캐피탈이 옷을 갈아입은 LG카드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2001년 출범 초기에는 탁월한 영업능력으로 덩치를 키웠다. 외환위기 직후이던 당시에 LG가 삼성을 이기는 것은 LG카드와 LG트윈스 뿐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몸집 불리기는 결국 대형 부실로 이어져 카드사태의 주범으로 몰렸고, 2007년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됐다.
삼성그룹 계열 금융회사들은 멀쩡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어 참고로 설명하자면, 삼성생명 삼성화재는 제조업 기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동방생명 안국화재라는 원래 금융회사들이 삼성그룹에 인수 편입된 기업들이다.
제조업이 함부로 금융시장을 넘봤다가 참담한 실패를 했으니 빅테크 역시 금융업에서 고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잘 만들어 많이 팔면 되는' 제조업과 달리 빅테크는 은행과 사업영역이 일치한다. 은행이 빅테크를 두려워해야 할 가장 큰 이유다.
빅테크의 업역은 플랫폼사업이다. 플랫폼사업은 공급자와 수요자를 중개한다. 그래서 빅테크가 처음 손을 뻗친 업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인터넷쇼핑이었다. 집이 필요한 자와 집이 있는 자를 매매 또는 전세라는 이름으로 연결하는 부동산중개 영역에도 진출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갖고 있는 취재원과 독자를 연결하는 것이 언론이고, 네이버 다음도 이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에는 빅테크가 변호사, 의사 영역도 넘보고 있다. 지금은 변호사와 법률소비자를, 의사와 환자를 연결하는 수준이지만 이들이 직접 변호사, 의사를 고용하는 순간 법률시장과 의료시장도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은행도 돈이 있는 자와 돈이 필요한 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사업이라는 점에서 빅테크와 업역이 일치한다. 은행은 자본을 중개하지만, 빅테크는 모든 것을 중개한다. 게다가 IT 경쟁력에서는 빅테크가 결코 밀리지 않는다. 단순히 예금 받고 대출하고, 펀드, 보험을 파는 것이라면 은행보다 네이버, 카카오가 훨씬 낫다.
그나마 은행은 지점이라는 물리적 플랫폼이 빅테크와 차별점이었다. 그러나 점포를 줄이고 인터넷·모바일 뱅킹으로 서비스의 중심을 옮겨가면서 더 많은 영역이 빅테크와 겹쳐졌다. 유일하게 남은 경계는 규제다. 하지만 규제가 영원한 버팀목이 될 수는 없다.
은행이 빅테크에 맞서려면 금융 본연의 본업 경쟁력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고객과 마주 보고 대화하며 쌓은 신뢰,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오프라인 플랫폼, 오랜 기간 누적된 신용정보와 평가 노하우.... 이런 본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빅테크가 할 수 없는 독보적 서비스를 찾아내야 승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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